누군가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소위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부족함이 없고, 배고픔을 모르며, 교육과 인간관계마저도 자연스럽게 열린 문을 따라간다. 그들은 인생이란 강 위에 놓인 다리를 아무런 울퉁불퉁함 없이 건넌다. 걷다 보면 이미 누군가 닦아놓은 길이 있고, 넘어지려 하면 누군가 손을 내민다. 그들에게 인생은 대개 평탄하다. 운명은 때때로 노력 이전에 이미 방향을 정해놓는 듯하다.

그러나 또 다른 이들은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다. 누군가는 "가난은 죄가 아니다"라 말하지만, 실제로 가난은 수많은 불이익과 편견의 굴레를 안긴다. 흙수저로 태어난 이들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고단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 밥 한 끼를 걱정해야 하고, 교육의 기회조차 스스로 쟁취해야 하며, 성공보다는 생존이 더 절박한 문제로 다가온다. 어떤 이들은 끝내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밑바닥을 전전하다 인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흙수저가 어둠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태생은 가난했지만, 비상한 용기와 집요한 끈기로 찬란한 성공을 이룬 이들도 있다. 그들의 인생은 참으로 아름답다. 존경받을 만한 의지와 인내심, 그리고 남다른 열정은 세상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기까지 한다. 고(故) 정주영 현대 회장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맨손으로 세계적인 기업을 일구어냈고, 김우중 전 대우 회장 또한 가난과 싸우며 한국 경제의 기적을 일군 인물이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면 애플의 스티브 잡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그리고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역시 자수성가의 대표적인 예다. 물론 이들 중 몇몇은 태생부터 완전히 가난하진 않았지만, 누구도 그들이 이룬 성공을 우연이라 말하진 않는다. 끊임없는 도전과 고통의 시간을 통과한 끝에 비로소 얻게 된 영광이기에 더욱 값지다.
학창 시절, 나는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트문트』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작품 속에는 정반대의 인생을 걷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하나는 평탄하고 안정된 수도원 생활을 택한 인물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밑바닥까지 경험하며 방황과 깨달음을 통해 성장하는 인물이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과연 어떤 인생이 더 값지고, 진짜 인생의 의미에 가까운 것일까?
정답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온실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삶은 부러움을 살 수 있을지언정, 인간 존재의 깊은 본질을 말해주진 못한다. 오히려 상처받고 넘어지며, 다시 일어나고 싸워야 했던 인생이 더 인간적이고, 때론 더 숭고하게 느껴진다. 고통 속에서 피어난 꽃은, 아무리 작고 왜소해도 그 의미만큼은 찬란하다.

금수저로 태어난 삶이든 흙수저로 시작한 인생이든,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어떤 정신과 태도가 깃들어 있었는가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냈는가, 그 인생을 통해 무엇을 남겼는가가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다. 금수저 인생이 부러울 수도 있지만, 흙수저 인생 속에서 피어난 인간다움과 생존의 의지는 때로 세상의 어느 금보다도 빛나 보인다.
그리고 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도 않았고,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그처럼 대단한 자수성가를 이루지도 못했다. 그저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고달프고 소박한 일상 속에서 삶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크고 작은 굴곡을 마주하며,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버티며, 그렇게 묵묵히 생을 살아낸다. 내가 선택한 인생이 대단한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더라도, 마지막 날까지 성실하게, 나답게 살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