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동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어쩌다 미국 서부 영화에나 나올 법한 마차를 타고 뚜벅뚜벅 거리를 달리는 한 무리의 짚시들을 마주칠 때가 있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은 하이웨이 위를 질주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낡은 마차에 삶을 싣고 천천히 움직인다. 바퀴는 오래된 리듬을 끌고, 바람은 마차 뒤로 작고 낮은 노랫소리를 실어 보낸다. 그 순간 나는 짚시의 노래를 떠올린다.
짚시, 혹은 로마(Romani) 사람들. 그들의 기원은 먼 인도 북서부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백 년 전, 유럽으로 흘러들어온 이들은 언제나 이방인이었고, 종종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정착하지 못한 유랑민,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들’. 그러나 그들이 어디서나 지니고 다닌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슬픔과 자유, 분노와 열정을 끌어안은 그 음악은 시간이 지나며 클래식이라는 이름 아래 승화되기도 했다. 파블로 데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 바이젠(Gypsy Airs)*은 그 대표작이다. 바이올린 선율은 처음엔 조용히 속삭인다. 그러나 이내 불꽃처럼 튀고, 마치 억눌려 있던 감정이 폭발하듯 빠르고 격렬하게 몰아친다. 그것은 단순한 악상이 아니다. 지난한 삶을 견뎌온 사람들의 고함이며, 억압에 대한 저항이다.
비슷한 정서를 지닌 또 다른 곡, 몬티의 *차르다시(Csárdás)*도 짚시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곡은 천천히 시작되어 한 여인의 울음처럼 느릿하고 애잔하다가, 이내 전통 춤의 박자를 타듯 빠르게 전환된다. 그것은 단절과 회복, 눈물과 축제를 오가는 짚시의 삶 그 자체다. 언제나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늘 음악으로 돌아왔다.
나는 짚시의 노래를 들을 때면, 늘 마음 한켠이 먹먹해진다. 그것은 내가 가지지 못한 자유에 대한 동경일 수도 있고, 어쩌면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던 나 자신의 모습과 닮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어딘가를 떠도는 영혼이며, 그 여정 속에서 자신만의 노래를 하나씩 갖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마차는 여전히 유럽의 먼 시골길을 달리고, 짚시의 바이올린은 그 길 위에서 울린다. 세상은 변해도, 그들의 노래는 여전히 우리 마음을 울리고 있다. 그것이 짚시의 진짜 유산이다. 누군가에게는 낯선 음악일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삶 그 자체다.